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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장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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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빈 장씨 . . . . 183회 일치
         |이름 = 옥산부대빈 장씨 玉山府大嬪 張氏
         |이름 = 희빈 장씨(옥산부대빈 장씨)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년]]<ref>숙종 35권, 27년(1701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9월 28일(임자) 2번째 기사</ref> [[11월 3일]] ([[음력 9월 19일]])<ref>승정원일기 숙종 15년~19년</ref> ~ [[1701년]] [[11월 7일]] ([[음력 10월 8일]])), '''장희빈'''(張禧嬪) 또는 '''옥산부대빈 장씨'''(玉山府大嬪 張氏)는 조선의 제19대 왕 [[조선 숙종|숙종]]의 [[빈 (지위)|빈(嬪)]]으로, 제20대 왕 [[조선 경종|경종]](景宗)의 어머니이다. [[조선 숙종|숙종]] 임금보다는 2년 연상이다. 본명은 '''장옥정'''(張玉貞)<ref>[http://yoksa.aks.ac.kr/jsp/aa/ImageView.jsp?aa10up=kh2_je_a_vsu_30613_000&aa10no=kh2_je_a_vsu_30613_001&aa15no=&aa20no=&pageno=&imgnum=JE_A_30613_001_000042&imgsize= 《단암만록》]/[[민진원]] 著</ref>, 본관은 [[인동 장씨|인동]](仁同)이다. 아버지는 [[역관]] 출신인 [[장형 (조선)|장형]](張炯)이며, 어머니는 [[장형 (조선)|장형]]의 계실인 윤씨이다. 역관(驛官) [[장현 (조선)|장현]](張炫)의 [[종질녀]]이다.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이다.
         희빈 장씨는 [[사역원]] 봉사(종8품)를 지냈던 [[장형 (조선)|장형]](張烱)<ref group="주">장형(張烱)의 형(烱)은 경으로도 읽을 수 있다.</ref>(1623~1669)과 그의 후처인 [[파평 윤씨]](1626~1698)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동기로는 아버지 [[장형 (조선)|장형]]의 전처였던 [[제주 고씨]](?~1645)의 소생인 이복 오빠 장희식(1640~?)과 윤씨 소생의 동복 언니<ref group="주">[[장희재 (조선)|장희재]]의 누나이다. 따라서 1650년 이전 생임을 알 수 있다.</ref> 한 명, 동복 오빠인 [[장희재 (조선)|장희재]](1651<ref group="주">《승정원일기》 숙종 27년(1701년) 11월 2일 기록에 장희재의 나이가 당 51세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1651년 생임을 알 수 있다.</ref>~1701)가 있다. 최근까지 그녀의 생년에 대해 흔히 미상이거나 [[조선 숙종|숙종]]의 2세 연하, 혹은 5살 연상 등으로 기록되기도 하는데 《숙종실록》에 수록된 국청죄인 자근례의 공초 내용 중에 희빈 장씨가 기해생(1659년 생)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인용문|오례가 신사를 행할 때에 숙정 등 여러 사람들이 또 같이 참석하여 축원하기를, ‘기해생(己亥生)【장씨(張氏)가 기해년에 났다.】을 몰래 도와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중략) 지난해 6월에 오례가 숙정에게 ‘10월에 마땅히 뇌동(雷動)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원컨대 상사(賞賜)를 받게 해 주소서.’라고 하니, 숙정이 ‘만약 그와 같이 된다면 마땅히 중한 상을 받을 것이니, 반드시 세자와 기해생을 몰래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조선왕조실록》숙종 35권, 27년(1701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9월 28일(임자) 2번째기사}}
         아버지 [[장형 (조선)|장형]]은 [[사역원]] 봉사를 재직하였지만 일찍 은퇴하고 집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음률을 즐기다가 장씨가 막 11세가 된 1669년 1월 12일에 사망했다. 그녀보다 19세 연상인 이복 오빠 장희식은 18세의 나이로 1657년 식년시 역과에 장원을 하여 사역원 직장(종7품)이 되었지만 곧 사망하였다. 장희식의 아내 이씨는 절충장군 이천연의 딸이다. 할아버지 장응인은 《통문관지》에 행적이 기록된 [[조선 선조|선조]] 때의 명역관으로, 생전 최고 관직이 정3품 [[첨지중추부사]](무관직)에 이르렀고, 전쟁 중에 무관으로 참전한 바 있으며 시재(詩才)도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선(善)을 가훈으로 삼아 이 단어를 쓴 종이를 항상 품에 넣고 다녔다고 전한다. 할머니 남포 박씨는 산학 별제 박심의 딸이다. 외할아버지 윤성립(尹誠立, 1689년 정경으로 추증)은 일본어 전공의 사역원 첨정(종4품)<ref group="주">사역원 역관의 품작은 정3품 정(正) 1명으로 시작하여 아래로는 종3품 부정(副正) 1명, 종4품 첨정(僉正) 1명으로 내려간다.</ref> 이었으며, 1653년에도 생존했던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남아있다.
         외할머니 변씨는 조선 최고의 갑부 역관으로 유명했던 [[변승업]]의 당고모로, [[변승업]]의 아버지이자 소설 《허생전》에 변부자로 등장했던 변응성의 사촌누이(백부의 딸)이다. 외삼촌 윤정석은 조선의 부를 장악했던 [[육의전]]의 면포 상인이었다.<ref>《조선왕조실록》숙종 21권, 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5월 9일(갑진) 4번째기사</ref><ref group="주">윤정석의 본래 출신이 기록된 《숙종실록》에는 "시인(市人)으로 면포(綿布)를 파는 자"로 기록하고 있다. 17세기 조선의 한성에서 면포를 팔 수 있는 건 오직 [[육의전]] 상인 뿐이다.</ref> 1701년 [[무고의 옥]]에 연루되어 공초되었을 때의 기록에 따르면 1680년 장씨가 출궁되어 은평구 친정에서 머물 당시에 담 하나를 두고 이웃에 살았던 만큼 누이인 윤씨와 관계가 매우 각별했음을 알 수 있다.
         언니는 관상감 관원인 김지중에게 출가하여 1691년 당시 관직이 종7품 직장이었다. 오빠 장희재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희빈 장씨가 [[조선 숙종|숙종]]의 후궁이 되기 7년 전인 경신년(1680년)에 키가 크고 외모와 무술이 뛰어난 명문가의 자제만으로 구성된 [[내금위]]에 재직<ref>《조선왕조실록》숙종 35권, 27년(1701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10월 22일(을해) 3번째기사</ref> 하였으며 1683년에는 좌포청 부장으로 있었다. 아버지 [[장형 (조선)|장형]]의 사촌형인 [[장현 (조선)|장현]]은 [[조선 효종|효종]] 8년에 이미 정2품 자헌대부를 제수받고 숙종 1년에는 이미 종1품 숭록대부에 올라 공을 세워도 더이상 품계가 올라갈 수 없어<ref group="주">생전에 정1품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건 [[문관]]에게 한정된다. 《동의보감》의 저자이기도 한 명의관 [[허준]]은 [[광해군]]에게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제수받았다가 문관의 반발에 의해 취소되었고, 사후에야 비로소 추증됐다.</ref> 자식과 조카가 대신 승봉되어야 했던 거물 역관으로 재산은 국중거부의 명성을 얻을 정도였으며, [[장현 (조선)|장현]] 형제의 자식들은 무관 및 역관, 혹은 의관으로 고위직에 있었다. 그녀의 일족이 비록 문신 사대부 가문은 아니었지만 조선에서 손 꼽히는 대부호였으며 사회적 위치 또한 결코 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희빈 장씨의 입궁 시기는 불분명하다. 그가 11세의 어린 나이에 아비 [[장형 (조선)|장형]]을 잃고 생계가 어려웠던 탓에 궁녀가 되었다는 주장과 [[장형 (조선)|장형]]이 사망하기 전에 역시 궁녀였던 딸이 있는 [[장형 (조선)|장형]]의 사촌형 [[장현 (조선)|장현]]의 권고를 받아 막내 딸인 장씨를 입궁시켰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생부 [[장형 (조선)|장형]](張炯)의 옥산부원군신도비 기록에 따르면 희빈 장씨가 어린 나이에 간택되어 입궁해 성장한 것으로 되어있으며, 숙종 실록에도 머리를 스스로 땋아 올리기 전에 입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ref>숙종실록 15년 5월 6일 2번째 기사</ref>
         일부 역사학자들은 희빈 장씨가 아비의 사후에 몸을 의탁하고 있던 당백부 [[장현 (조선)|장현]]이 [[경신환국]]에 휘말린 후 가세가 기울자 서인들과 권력 투쟁을 벌이던 남인들의 입궁 제의를 받아 궁녀로 입궐하였다고 주장하여 현재까지 정설로 알려졌지만, [[경신환국]] 당시 그의 나이가 이미 22세였기에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ref group="주"> 궁녀의 통상 입궁 연령은 4세부터 16세이며, 조선시대 여성들의 법적 혼인 연령은 14세~20세이다. 부모가 50세를 넘긴 경우엔 관아의 특별 허가를 받고 12세 이상의 자녀를 혼인시킬 수 있는데 16세기 이후엔 수 차례에 거듭된 외란으로 남성의 숫자가 급감하였고 처녀를 차출하여 청으로 진상하거나 궁녀로 뽑는 분위기로 인해 법금을 어기고 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아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ref> 이러한 주장의 근원은 희빈 장씨가 [[경신환국]] 당시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의 사주를 받고 입궐하였다는 [[인현왕후]]의 주장으로 불거진 것인데, [[경신환국]]과 같은 해 말에 장씨가 강제 출궁이 되었다가 7년 후인 [[1686년]]에 다시 입궁했던 만큼 이미 궁녀인 신분으로 출궁을 당한 후에 [[남인]]과 연계하여 돌아왔다는 것이 오역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또한 [[조선 효종|효종]] 때 이미 막대한 부를 쌓은 [[장현 (조선)|장현]]도 딸을 궁녀로 입궁시켰으며, [[조선 현종|현종]] 5년에 대왕대비전의 궁녀로 뽑혔다가 이미 사주가 오간 상대가 있으니 정혼을 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유로 출궁된 역관 최우의 딸의 전례<ref>현종실록 5년(1664 갑진 / 청 강희(康熙) 3년) 12월 30일(정해) 2번째기사</ref> 도 있는 만큼 희빈 장씨의 가세가 빈궁하여 궁녀가 되었다는 가설은 억측에 불과하다.
         조사석의 도움으로 대왕대비전의 궁녀였던 장씨는 [[조선 인조|인조]]의 [[계비]]이자 [[조선 숙종|숙종]]의 증조모 뻘인 [[장렬왕후|자의대비]] 조씨를 웃전으로 모셨다. 장씨가 출궁되었을 때 [[장렬왕후|자의대비]]가 친필로 서신을 써서 법적 며느리이자 친정 외질녀인 [[숭선군]]의 부인 신씨에게 장씨를 돌보게 한 것이나 장씨의 재입궁을 주선했던 것, 조씨가 내전([[인현왕후]])과 소원하고 장씨를 치우치게 사랑했다는 기록<ref>숙종실록 12년(1686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0일(경신) 4번째기</ref> 의 존재 등으로 미루어 장씨가 [[장렬왕후|자의대비]]의 각별한 애정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680년 10월 26일, [[조선 숙종|숙종]]의 초비(初妃)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로 요절했다. 장씨가 숙종을 모시게 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숙종실록에 [[인경왕후]]가 죽고난 후에야 비로소 숙종을 모셨다는 기록이 여럿 존재하며, 11월 이후 혜성이 나타났는데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무렵이 이때라는 기록이 존재하니 그녀가 숙종의 승은을 입은 시기가 [[인경왕후]]의 죽음 후임을 부정할 수 없다.
         같은 해, 숙종의 어머니였던 대비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金氏)에 의해 강제로 출궁되었다. 숙종실록이나 인현왕후전 등에는 숙종을 모시기에 장씨의 출신이 천하고 성품이 극악한 이유로 쫓아낸 것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경신환국]] 당시 [[장현 (조선)|장현]] 일가가 [[복평군]] 형제와 절친한 사이이니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해 몰락시킨 장본인이 바로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 오라비 [[김석주]]였던 것으로 비추어 장씨의 보복을 견제한 탓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녀가 출궁된 직후인 [[1681년]] 1월 3일에 계비 간택령이 내려졌고, 3월에 [[조선 숙종|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대비 김씨]]와 [[송시열]]의 추천으로 민씨([[인현왕후]])가 간택되어 [[1681년]] 5월 14일 [[조선 숙종|숙종]]과 민씨가 가례를 올렸는데 본래 [[명성왕후|대비 김씨]]의 친정 가문과 원한이 있던 [[송시열]]과 [[민유중]]<ref group="주">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우명]]은 당파로선 엄연한 서인이었지만 [[조선 현종|현종]]의 척신으로서 예송논쟁 당시 [[송시열]]과 [[송준길]]을 비판하고 [[남인]]의 손을 들어주어 [[서인]]의 공적이 되었다. [[민유중]]은 과거 [[김우명]]의 형인 [[김좌명]]과 심하게 다투어 벼슬을 버리고 지방에 은거하였던 경력이 있다.</ref> 의 혈육인 민씨가 [[조선 숙종|숙종]]의 계비가 된 것은 [[경신환국]] 당시 [[서인]]과 손을 잡았던 명성왕후의 정치적 계약임을 짐작할 수 있는 만큼 [[인경왕후]]의 죽음 직후 계비로 내정된 민씨를 위해 장씨를 [[조선 숙종|숙종]]의 곁에서 치운 것일 가능성도 존재한다.<ref group="주">본래 정처의 3년상이 마치기 전에 재혼하는 것은 경국대전과 의례의 조항으로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이는 왕 또한 마찬가지이다. [[조선 숙종|숙종]]이 [[인경왕후]] 김씨의 사후 3년상은 고사하고 불과 반 년도 되지 않아 [[인현왕후]] 민씨와 재혼을 한 것은 조선 왕실 역사 상 전례에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논란이 있어야 할 [[인현왕후]] 민씨와의 재혼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던 서인은 [[인현왕후]] 민씨의 사후 3년상이 마쳐지기 전에 [[조선 숙종|숙종]]이 계비 간택령을 내리라는 명을 내리자 반대를 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37권, 28년(1702 임오 / 청 강희(康熙) 41년) 8월 27일(병오) 2번째기사</ref>
         1680년 겨울, 장씨가 출궁되자 [[장렬왕후|자의대비]]가 숭선군저에 친필서찰을 넣어 [[장렬왕후|자의대비]]의 친정 질녀이자 숭선군의 부인인 신씨의 보호를 받도록 하였다. 출궁된 장씨는 가장이 된 오라비 [[장희재 (조선)|장희재]] 부부의 집에서 어머니 윤씨와 함께 지냈다. 1701년 공초 당시 [[장희재 (조선)|장희재]]의 처 작은아기는 출궁된 당시에도 장씨가 무속에 기대었다는 사실을 발고한 바 있다.
         흔히 장씨가 출궁된 당시에 궁핍한 삶을 살았고, 숭선군 부인 신씨와 [[장렬왕후|자의대비]]를 자주 방문하여 다시 입궁하길 간절히 소원하였다고 알려졌는데 이 해석에는 오차가 존재한다. 출궁된 궁녀는 왕궁 출입은 고사하고 엄중한 감시 아래 사가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장씨가 출궁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당숙부인 [[장현 (조선)|장현]]과 장찬 형제가 유배형에서 풀려났기 때문이다. 이는,
         라는 [[사간원]] 헌납 [[윤빈]]의 비판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683년에 [[장희재 (조선)|장희재]]의 직위가 포도부장이었던 기록이 존재하며<ref>숙종 17권, 12년(1686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0일(경신) 4번째기사</ref> 장씨의 동복 언니는 [[관상감]] 직장이었던 김지중에게 출가한 상태였는데 1701년 [[김지중]]의 증언으로 미루어 김지중이 처가에 왕래하며 장희재와 밀접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는 만큼 생계가 어렵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장씨의 외삼촌 윤정석은 면포를 팔던 시전상인이었는데, 면포(무명)가 국법 상 [[육의전]]만이 매매가 가능한 독점 상품이었던만큼 윤정석이 일개 장삿꾼이 아닌 [[육의전]] 상인이었음을 뜻하며 이는 윤정석이 상당한 재력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윤정석은 장희재의 집과 담을 하나 두고 살았을 만큼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다.
         [[1685년]] 대비 김씨의 3년상이 마쳐지자 [[자의대비|대왕대비]] 조씨는 [[조선 숙종|숙종]] 부부에게 과거 대비 김씨가 출궁시켰던 그녀의 궁녀 장씨를 재입궐시킬 것을 권고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그녀를 그리워하는 [[조선 숙종|숙종]]을 안타깝게 여긴 [[인현왕후]]가 숙종에게 간해 그녀의 재입궁을 주선했다고도 한다. 어쨌던 대비 김씨의 3년상이 [[1685년]] 12월 5일에 마쳐졌고, [[1686년]] 2월 27일에 후궁 간택령이 있었던만큼 장씨의 재입궁이 이 기간 사이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궁으로 돌아온 장씨를 향한 숙종의 총애가 지극하자 [[서인]]과 [[인현왕후]] 민씨의 반발이 격렬했다. [[인현왕후]]는 장씨를 견제하기 위해 서인과 합세해 1686년 3월, 서인 영수 [[김수항]]의 종손녀인 [[영빈 김씨]]를 간택후궁으로 입궐시켰다. 숙종 12년인 1686년 2월 27일 기사에 [[인현왕후]]가 여러차례 간택후궁을 들일 것을 종용했다는 기록이 있어 장씨가 재입궁 한 것을 [[인현왕후]]가 후회하였거나 애초 원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앞서 1683년에는 [[인현왕후]]의 큰아버지인 좌의정 [[민정중]]이 장씨의 오라비 [[장희재 (조선)|장희재]]가 [[정명공주]]의 생일잔치에서 노래를 부른 첩 안숙정<ref group="주">안숙정은 숭선군저의 가비(歌婢)로서 노래 실력이 장안 최고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측실이지만 이미 출가를 한 지 4년이나 지난 그녀가 정명공주의 잔치에 노래를 부른 것은 그녀의 명성이나 주인이었던 [[숭선군]]의 주선 때문이었을 것이다.</ref> 을 취객의 희롱에서 도망치게 하였다고 호된 매질을 가한 바 있는데, 좌의정이 포도부장에게 직접 벌을 내린 것도 이치에 맞지 않으며 엄연한 무관의 아내를 희롱한 취객에게 죄를 묻지 않고 그녀를 도망치게 한 남편에게 벌을 내린 것은 사사로운 감정이 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정이야 어찌됐던 [[민정중]]이 [[장희재 (조선)|장희재]]에게 매질을 한 것은 사실이니 [[인현왕후]]로선 장씨의 입궁이 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현왕후]]는 궁녀 장씨의 교만함을 훈계하겠다며 아랫사람에게 장씨를 매질토록 시키기도 하였다.<ref group="주">인현왕후전에는 [[인현왕후]]가 장씨를 교화하기 위해 직접 회초리질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ref>
         서인 영수이자 [[송시열]]의 최측근인 [[김수항]], [[김수흥]]의 종손녀 김씨가 간택되어 3월 28일에 숙의로 봉해졌고 노비 150명이 하사되었다. 5월 27일에는 소의로 진봉되었으며 얼마 뒤에는 종1품 귀인으로 봉해졌는데 회임은 고사하고 [[조선 숙종|숙종]]의 사랑도 받지 못한 김씨에게 이러한 특별진봉이 거듭된 것은 서인 영수의 종손녀라는 신분과 장씨를 향한 [[서인]]과 [[인현왕후]]의 견제를 의식한 [[조선 숙종|숙종]]의 방어책이었다.<ref group="주">김씨가 [[조선 숙종|숙종]]의 총애를 받지 못한 것은 숙종 17권, 12년(1686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0일(경신) 4번째기사에 언급되어 있다.</ref>
  • 청송군 . . . . 17회 일치
         [[1895년]]에 [[23부제]]에 의해 안동부 청송군이 되었다. 이듬해 13도제를 실시하면서 [[경상북도]] 청송군이 되었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진보군의 대부분을 합하여 8개 면으로 개편하였다. 진보군의 영역 중 청송군에 편입되지 않은 곳은 [[영양군]]에 편입되었다. 1979년 5월 청송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청송읍에서 이웃한 [[안동시]], [[영덕군]], [[포항시]], [[의성군]]으로 이동하려면 모두 고갯길[* 심지어 [[914번 지방도]]와 [[35번 국도]]를 통해 안동으로 가려면 2번이다.]을 넘어야 한다. 유일하게 고갯길을 안 넘어도 되는 곳은 북쪽의 [[영양읍]] 방면 밖에 없다.
         '''삼'''자현 '''남'''쪽의 현동면, 안덕면, 현서면의 세개 면을 묶어 삼남지역이라고도 하는데, 여기는 청송읍을 가려고해도 삼자현이라는 고개를 넘어야 하고, 포항, 안동, 의성, 영천 모두 고개를 넘지 않고는 나갈 수 없다. 대신에 35번 국도 버프로 안동과 영천방면으로는 각각 마사터널, 노귀재터널이 완공되어 있고, 삼자현 고개에는 터널 공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군청 소재지인 청송읍보다 진보면의 교통사정이 훨씬 좋다. 진보면을 관통하는 [[34번 국도]]가 청송 관내 국도 중 포장이 가장 빠른 [[1975년]]에 이루어진 곳이다. [[동서울터미널|서울]], [[부산종합버스터미널|부산]], [[신세계 동대구 복합환승센터/동대구터미널|대]][[북부정류장|구]], [[안동터미널|안동]], [[영천시외버스터미널|영천]], [[영덕군|영덕]], [[포항시외버스터미널|포항]] 방면으로 시외버스가 운영되지만, 영천을 제외하면 어느방면이든 진보 쪽의 횟수가 훨씬 많다. 이는 인접한 [[영덕군]], [[영양군]]과 [[안동시]], [[서울특별시]] 등지를 잇는 시외버스들이 모두 진보를 경유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청송읍과 안동, 서울을 잇는 시외버스도 진보를 경유한다. 안동으로 가는 시외버스편이 그나마 배차가 많은 편이다. 동서울 및 부산에서 청송으로 가는 시외버스는 주왕산까지도 가니 참고. 다만 진보면에서도 안동이나 영덕으로 갈땐 고갯길을 넘어야 한다. 만만치 않은 U자 코스이니 자가용은 운전에 조심할 것. 가랫재(안동 방향)와 황장재(영덕 방향) 두 고갯길 모두 터널 계획이 있다. 터널이 개통 되면 기존의 시간에서 10분 정도는 가볍게 당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진보 방면은 [[북부정류장]]에서 타야 한다.(안동 경유)
         [[농어촌버스]]는 [[청송버스]]에서 운행한다. 하지만 진보-청송이나 청송-주왕산 같은 몇몇노선을 제외하고는 전부 [[오지(지리)|오지]][[노선]]... 특히나 현서면, 안덕면, ~~현동면~~[* 2017년 개편으로 현동에서는 청송읍으로 가는 농어촌버스가 생겼다. 1일 2회 운행(..)]의 삼남지역에서는 농어촌버스로 청송읍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여기서 청송읍에 가려면 청송-대구 [[아성고속|시외]][[천마고속|버스]]를 타야한다. 그런데 현서면에는 [[의성여객|의성군 농어촌버스]]와 [[안동 버스 28|안동시 시내버스]]를 이용해서 의성군과 안동시로 갈 수 있다. 이 때문에 삼남지역 사람들은 청송읍보다는 영천, 의성, 안동, 포항 멀리는 [[대구광역시]]로 많이 나간다.
  • 예천군 . . . . 15회 일치
         [[경상북도]] 북서부에 있는 군. 인구는 5만여 명. 동쪽 [[안동시]], 북동쪽 [[영주시]], 서쪽 [[문경시]],남서쪽 [[상주시]], 남동쪽 [[의성군]], 북쪽 [[충청북도]] [[단양군]]이 있다.
         지형에서는 대다수 [[경상북도]] 북부지역에 위치한 도시들과 같이 [[소백산맥]]이 있어서 산악지형을 띄고 있지만, 이 곳은 상대적으로 평지가 많다. 인구로 보자면, 70년대 중반에는 한 때 인구가 16만 명이 넘는 [[리즈시절]]도 있었지만 성장동력 부재와 [[농업]]종사 인구 감소로 인해 80년대 말과 90년대 초까지 크게 감소했고 이후 90년대 중반부터는 6만 명에서 4만 5천여 명으로 더디지만 지속적인 감소 추세에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경상북도|경북도청]] 이전으로 안동, 예천 접경지역에 [[경상북도청신도시]]이 조성되어 큰 성장동력이 생겼다는 것이다. [[2018년]] [[1월]] 드디어 13년만에 인구 50,000명을 넘기게 되었다.
         인구의 대다수가 1차 산업에 종사, 예천읍내 한정으로 상업, 공무원, 교원 종사자가 있다. 그 외에 [[제16전투비행단]]의 영향으로 [[군인]]도 제법 있다. 낙후한 [[군]] 지역이다 보니 상업지역이 빈약하기 때문에, 상당수 사람들은 문경, 안동, 영주 등으로 나가서 일을 해결한다. 풍양면, 용궁면 지역은 상주·문경권에 속해 있으며, 감천면 지역은 영주권에 속해있다. 나머지 지역은 대체로 안동 [[생활권]]에 속한다.
          * [[현종(고려)|현종]] 9년 : 안동부에 편입되며 [[명종(고려)|명종]] 2년 태자의 [[태]]를 이 고을에 묻었다고 하여 기양현으로 승격.
          * 1896년 : [[23부제]] 시행에 따라 안동부 예천군이 됨.
          * 1906년 : 화장면, 동로면을 문경군, 다인면을 비안군으로 예속. 감천면을 안동군으로부터 편입.
         [[예천공항]]이 있었지만 이용객 급감으로 2004년에 폐쇄된 후 군용으로 전환되어 현재는 이용불가하다. [[중앙고속도로]] 개통 전에는 [[김포국제공항]] - 예천 항공편이 수요가 꽤 있었으나(안동/예천/문경에서 서울까지 자가용 5시간, 기차 4시간 30분, 여객기 1시간) [[중앙고속도로]] 개통 이후 이용객 급감으로 폐쇄되었다. 현재 예천 비행장에는 [[공군]] [[제16전투비행단]]이 주둔.
         예천군의 동쪽을 통과하는 [[중앙고속도로]]에 [[예천IC]]가 있다. 문경, 안동 방면으로 [[34번 국도]], 의성, 영주 방면으로 [[28번 국도]], 군 북서부를 [[59번 국도]]가 지난다. 하지만 서울 방향으로 가는 경우 [[예천IC]] 보다 점촌을 지나 [[중부내륙고속도로]] [[점촌함창IC]]를 이용하는것이 훨씬 빠르다. 연평균 이용량이 300대 정도로 매우 적은 교통량. 예천읍과도 상당한 거리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앙고속도로]]가 안동과 영주를 직결하지 않고 예천으로 우회하도록 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중앙고속도로]]가 예천으로 우회한 것은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절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지역 출신 정치인 [[유학성]]의 입김이었다고 한다. [[예천공항]]이 생겼던 것도 [[유학성]]이 주도했다는 말이 있다.
         시외버스는 [[예천시외버스터미널]]을 통해 이용 가능하다. 기타 [[농어촌버스]]는 [[예천여객]]에서 운영하고 있다. [[2012년]] [[7월 1일]]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군 단위 최초로 [[티머니]] [[교통카드]]를 도입하였으며, [[중앙고속도로]] - [[중부내륙고속도로]] 라인에 있는 모든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시군과 공용한다. [[2013년]] [[3월 1일]]부터는 군계 내 [[구간요금]], [[2014년]] [[7월 1일]]부터는 군계외 구간요금을 폐지하고, 무료환승제도가 도입으며, [[2016년]] [[3월 1일]]부터는 [[안동시 시내버스]]와도 무료환승이 가능하다.
         예천군 호명면과 안동시 풍천면에 도청신도시가 조성되었다. 도청 및 유관기관은 안동시 지역에 위치하지만 아파트 단지는 예천군 지역에 훨씬 더 많이 조성, 2018년 드디어 인구가 5만 명을 넘어섰다. 계획인구가 모두 들어와 예천시로 승격될 수 있었으나, 저출산으로 가구당 인구수도 줄어들었고, 안동시내에서 통근하는 사람도 많을 것으로 예측되어 승격은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이걸로 정부가 안동, 예천 통합을 제안했지만 예천에서는 예천읍 주민들을 중심으로 반대하고 나서고 있기 때문에 갈 길이 멀다. 다만 대구 - 경산과 같이 연담화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통합은 요원하지만 대신 도청신도시의 행정구역 이원화로 인한 문제점을 방지하기 위해 버스요금 단일화 및 광역환승, 택시영업구역 일원화 등이 이루어질 것이다. 통합을 한다고 해도 면적이 너무 커져서 문제점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어 다소 조심스러운 분위기다.
  • 영주시 . . . . 13회 일치
         [[경상북도]] 북부에 위치한 [[시(행정구역)|시]]. 인구는 2016년에 들어 10만 9천여 명으로 계속 인구가 줄고 있다.[* 1995년경에는 인구가 약 15만명이었다. 이때부터 따져도 매년 거의 2천명 꼴로 인구가 줄어든 셈. 그런데 2018년 현재 약 16만인 안동시 인구도 그 당시에는 거의 20만명에 달했다. ~~그때가 좋았지~~] 시의 동부에 [[봉화군]], 남부에 [[안동시]], 서부에 [[예천군]]이 있으며 북부는 죽령을 경계로 [[충청북도]] [[단양군]], 마구령을 경계로 [[강원도]] [[영월군]]과 맞닿아 있다.[* 영월군으로는 육로로 직결이 안 되어있어서 단양군 영춘면을 통과해야 한다.]
         대부분 [[소백산]] 자락인 시의 북부에 위치해 있다. 안동에 다소 묻힌 감이 없잖아 있지만 영주 역시 전통 문화의 향수가 짙게 배인 곳. 순흥면에는 선비촌이라는 한옥마을이 존재하고, 최초의 사액 서원인 소수[[서원]]이 이 곳에 위치한다. [[1박 2일]]에서도 촬영한 바 있다.
          * [[헌혈의 집]]이 없다. 하려면 [[안동]]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헌혈의 집은 대부분 특별시, 광역시와 지역 중심 도시에나 있지 영주시보다 인구가 많은 곳조차도 헌혈의 집이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므로 특이한 사항은 아니다. 비정기적으로 헌혈 버스가 학교로 오지만 1년에 1번꼴.(...)
          * 과거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극장 2개, 소극장 4개가 있었으나 90년대 말에 소극장 3개로 줄더니, 2018년 현재는 소극장 1개 밖에 안남아있다. 마지막으로 남은 '예당 시네마'는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데, 상가빌딩 2층을 쓰는지라 관이 1개밖에 없고 그 크기도 작다. ~~하지만 의자는 [[CGV]]에서 뜯어온 듯하다.~~ 그래서 대부분 영화를 보러 간다고 하면 안동으로 이동하여 [[메가박스]]나 [[CGV]]를 이용한다. ~~심지어 문경시에도 메가박스가 있는데!~~
         [[동남방언]] 중에서도 안동, 봉화, 예천 등 경북 북부지방 방언권에 속한다. 그러나 그나마 평야가 많은 안동, 예천 등과 달리 산악에 걸터앉은 지형인지라 영주-봉화 사투리는 안동과도 미묘하게 다르다. 때문에 경상북도에서도 사투리가 조금 이질적으로 들릴 수 있는 곳이다. 사실 제주도를 제외한 육지 지역에서는 사투리가 가장 심한 지역 중 하나인데, 서울에서 가장 먼 부산보다 그나마 수도권과 가까운 영주의 사투리가 더 알아듣기 어려운 이유는 강원도 남부지방과 충청북도 동부([[제천시]], [[단양군]]) 이들 지역의 사투리가 조금씩 섞여있기 때문. [[부산]]을 비롯한 경남 해안가 사람들은 북한이라고 하면서 어설프다고 놀리기도 한다. 가끔 수도권 사람들이 사투리 별로 안 쓴다고 하기도 한다. 다음은 영주 사투리의 예문이다.
          * [[경상북도]]에서는 [[경주시]] 다음으로 [[양반]]이 많았던 곳으로, ~~[[안동시]]는?~~ 전국에서는 경주, 목천[* 현재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및 그 주변.] 다음의 3번째 순위였다.
          * [[선비]] 명칭 사용 때문에 --양반-- [[안동시]]와 사이가 좋지 못해서 안동시와 영주시 간의 [[지역감정]]이 꽤 있는 편이다. [[http://www.yj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3474|이런]][[http://www.yj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9759|저런]] [[http://www.yj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761|내용]][[http://www.yj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7721|의]] 시사만평이 지역언론에 실리는 것을 보면[* 이 시사만평의 작가는 영주 모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다, 2015년 기준 같은 재단의 모 여고 교장으로 재직 중이라고 한다.] 이제는 선비 명칭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안동에 대해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진 듯. ~~[[우리의 주적은 간부|우리의 주적은 안동]]~~
  • 김재규 . . . . 10회 일치
         1943년 안동공립농림학교[* 해방 후 안동농림고등학교, 현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한 후, 그 해, 대구농업전문학교 중등교원양성소[* 이 당시에는 2년제 전문학교였다. 해방 후 대구농과대학을 거쳐 1951년 대구사범학교 등과 통합하여 경북대학교로 개교한다.]에 입학하여 1945년 수료하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중등교원의 수가 부족한데 반해, 조선 내에는 고등사범학교가 없었다. 문과의 경우 [[경성제국대학]] 졸업자 등으로 수요를 채울 수 있었지만, 이공계 쪽의 교사가 부족하여 일제는 각종 전문학교에 2년제 '교원양성소' 과정을 도입하여 교사인력을 충원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조선인이 징집 대상이 되었을 때 [[일본군 해군]]의 [[카미카제]] 양성을 위한 예과 후보생으로 차출되었으며 카미카제의 생존률이 0%라는것을 감안해보았을때 만약 일본이 빨리 몰락하지 않았다면 김재규는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해방 후 김천중학교[* 現 김천중학교&[[김천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육군사관학교|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2월 졸업하였는데, 졸업당시성적은 196명 중 14등으로 우수한 성적이었다. 그러나 중대장 대리로 복무 중에 군경체육대회 때 [[미 육군]]과 충돌을 일으킨 죄로 면관당한 후 잠시 낙향하여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 現 [[대륜중학교]]&[[대륜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였다. 그 후 복직되어 22연대 정보주임으로 안동지구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워 충무무공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 때의 공을 인정받아 3사단 22 연대 제 2 대대장으로 부임하는데, 공교롭게도 부임일에 6.25 사변이 발발한다. 김재규는 2대대를 지휘하며 의정부·대구·영덕 지구의 전투에 참여하여 북한군과 혈전을 벌였고, 6.25의 전투 중 치열하기로 손꼽혔던 황간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에 선봉에 서서 함경남도의 땅까지 밟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악화되어 남으로 후퇴하게 되고 이후 여수 제 2 보충연대장으로 부임한다.[* 참고로 박정희는 6.25때 후방에서 보급병과 장교로 근무하느라 전공은 커녕 북한군과 마주친 적조차 없다.] 1970년에는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57년에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낸 후 방첩부대장, 육군보안사령관, [[제3군단]]장을 역임한 후 육군 [[중장]]으로 전역하였다.
         [[군단장]] 시절 [[한계령]] 도로 건설을 지휘했으며, 이 때문에 한계령에 건설 중 사망한 장병 위령비에 이름이 들어가 있었으나 현재 위령비에는 그 부분이 삭제당했다 한다. 이 뿐만이 아니라 안동댐 건축 기념탑에도 원래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지만 [[10.26 사건]] 직후 그 이름 부분이 뜯겨나가 있다. 여담이지만 인트라넷 3군단 역대 군단장과 그가 복무했던 모든 부대에도 김재규 [[장군]]은 삭제되어 있다. 한편 이때 그의 [[전속부관]]이었던 [[박흥주]] [[포병]][[대령]]은 이것이 인연이 되어 김재규의 가장 충실한 심복이 되고, [[10.26 사건]] 당시에도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 자리에 있었고, 결국 박정희 암살에도 가담한다. 정말로 장래가 촉망받는 엘리트 장교였다.
         김재규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선 박정희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김재규가 자신의 변호인인 안동일에게 털어놓은 내용에 의하면 이승만은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알았지만 박정희의 성격은 절대로 물러설 줄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국민과 정부 사이에 수많은 희생자가 나올것이라 생각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 박정희를 사살한 것이라 말하였다.[[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28/2017052801948.html?Dep0=twitter&d=2017052801948|#]]
         그러나 민주화 이후 그에 대한 재평가가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함세웅 신부의 재평가 주장을 비롯하여 시사in 등의 일부 언론과 문영심 작가, 김재규를 변호했던 안동일 변호사, 천정배 의원 등이 김재규 재평가에 힘을 실어줬고, 공화국 시리즈 등 드라마에서도 비교적 호의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또 월간지 신동아 1996년 10월호에선 김재규를 특집기사로 다루었고, 최후진술이 담긴 육성테이프를 최초로 공개하면서 신동아 독자들에 의한 재평가 여론이 일었다. 당시 김재규의 최후진술을 듣고 감동받은 많은 독자들이 신동아의 편집실로 전화하여 "김재규를 그동안 잘못 알았다. 명예회복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달하였다고 한다. 허나 당시는 박정희 신드롬이 점점 떠오르던 시기라 김재규의 재평가 여론은 금세 묻히고 만다.[[https://news.naver.com/main/tool/print.nhn?oid=020&aid=0000006228|#]]
         초등학교 4학년 때 일본 순사가 조선인 나무꾼을 구타하는 걸 보고 '이 순사 도둑놈이다'라고 했다가 유치장에 갇힌 적이 있다.[* 아버지가 찾아오자 풀어줬다고 한다. 출처는 안동일 저서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
         김재규의 변호인이였던 안동일 변호사는 김재규의 첫인상은 겸손하고 정중하였으며 대화를 나눌수록 진정성이 느껴졌다고 평하였다.
         사형 직전까지 쓴 옥중 수양록을 보면, 본인은 사형을 피할 수 없더라도 동조한 부하들을 어떻게든 살리고자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변호를 맡은 안동일 변호사와의 접견에서 자기보다는 부하들을 위해 변호해달라고 부탁하였으며, 법정에서도 본인은 죽더라도 부하들은 선처해달라며 재판관들에게 호소하기도 하였다. 또한 부하 가족들의 생계를 염려하여 자신의 남은 재산으로 이들을 돌봐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김재규의 부인인 김영희씨가 김재규의 유언에 따라 부하 가족들의 교육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를 해준 덕분에 김재규의 부하 자녀들은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6&aid=0000007347|#]]
         >안동일 변호사와의 접견[[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28/2017052801948.html?Dep0=twitter&d=2017052801948|#]]
  • 의성군 . . . . 9회 일치
         [[경상북도]] 북부에 위치한 군. 2018년 6월 기준 인구는 약 5만 3천여명이다. 북쪽에 안동시, 동쪽에 청송군과 영천시, 남쪽에 군위군, 서쪽에 구미시와 상주시가 위치해있다. 의성군의 서쪽으로 낙동강 본류가 흐르며, 낙동강의 주요 지류 중 하나인 위천이 의성 군내를 관통하며, 경작지가 넓고 평야지대가 비교적 많다. 때문에 농업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했던 1970년대 중반에만 하더라도 인구가 20만을 넘을 정도로 제법 큰 군이었으나 이후 농촌 인구가 꾸준히 감소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리즈 시절]]보다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다.
         군 중심지인 의성읍이 비교적 군 동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중부의 봉양면(도리원)과 서부의 안계면이 각각의 소중심지 역할을 한다. 각각 안동/군위와 상주로 가는 시외버스도 따로 운행되고 있다.
         [[중앙고속도로]]와 [[중앙선]] [[철도]], [[5번 국도]]가 군의 남북을 관통한다. 영천, 군위를 거쳐 예천, 영주로 연결되는 [[28번 국도]]와 [[59번 국도]]도 있다. [[25번 국도]]는 단밀면을 잠깐 지나친다. [[의성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안계면에서 별도로 [[동서울터미널]]행 시외버스가 있다. 다만 원주 방면에서 의성으로 갈 때는 [[의성IC]]가 아닌 [[남안동IC]]를 이용한다. [[의성IC]]가 의성군 남쪽의 봉양면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동시|안동]] 생활권에 들어간다. 덕분에 과거에는 나름 교통의 요충지이며 농업이 주 산업이었던 1960~1970년대에는 지금보다 인구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의성군 내 탑리, 도리원, 안계같은 버스터미널은 의외로 규모가 있는 편이다.
         철도 교통은 [[안동역]] 외의 역이 모두 통과역이 된 안동과는 달리 [[의성역]]과 [[탑리역]](금성면)이 아직도 성업 중이다. 다만 [[중앙선]]의 이설[* [[안동역]] ~ [[영천역]] 구간은 복선노반 단선 전철로 건설한다. 단선이긴 하지만 나중에 별도의 토목공사 없이 선로만 옆에 하나 더 깔고 [[가공전차선]]도 추가로 올리면 그대로 복선이 되는 구조다.] 과정에서 [[탑리역]]은 폐역될 예정이다.
          * [[류성룡]] : [[하회마을]]에 종가가 있어서 안동 출신으로 알려진 편인데, 사실 태어난 곳은 외가가 있던 의성이다. 점곡면 사촌마을 출생.
  • 김륵 . . . . 8회 일치
         7세가 되던 해부터 양아버지 김사문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양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뒤에는 공부의 시기를 놓칠 것을 염려한 어머니의 배려로 어려운 형편에서도 집안에 작은 서재를 꾸미고 학업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16세에 안동의 인동 장씨(仁同 張氏)와 혼인하였다.
         그 뒤 다시 [[형조]][[참의]]에 제수되어 다시 조정에 나아갔고, 호조 참판 및 주역 교정청(周易校正廳)을 거쳐 명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冬至使)에 임명되어 [[연경]]으로 건너가 전란 후유증의 수습에 일익을 담당하고 귀국했다. 안동도호부사로 재직 중, [[선무공신|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 양 어머니 : 인동장씨([[1514년]] ~ [[1597년]]), 생원 장응신(張應臣)의 딸
         * 부인 : 인동장씨([[1541년]] ~ [[1586년]] [[6월 27일]]),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장순희(張順禧)의 딸
         ** 사위 : 권래(權來, 안동인, 군자감정)
         * 임진왜란 종전 직후 안동에 체류하며 류성룡과 더불어 [[정몽주]]의 문집인 포은집(圃隱集)의 교열, 교정에 참여하였다.
         * [http://www.andong.net/news-2007/view.asp?seq=981 백암 김륵] - 안동넷 뉴스 기사
  • 오원 (조선) . . . . 6회 일치
         |배우자 = [[안동 권씨]](安東權氏) 권정성(權定性)의 딸
         |부모= 부 오진주(吳晋周)<br> 모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安東金氏) [[김창협]](金昌協)의 딸
         **** 생모 :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安東金氏) - [[김창협]](金昌協)의 딸
         ***** 부인 : [[안동 권씨]](安東權氏) - 권정성(權定性)의 딸
  • 이현보 . . . . 6회 일치
         [[이흠]](李欽)의 아들로 안동 도산 분천리에서 태어났다.
         이때에 서연관의 비행을 탄핵했다가 안동에 유배됐으나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된다.
         밀양부사·안동부사·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중종 18)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효성이 지극하여 노나라 [[래자]]에 비견되었고 1519년 안동부사 재직당시 중양절에 화산양로연(花山養老宴)을 열어 부모님을 포함한
         ** 어머니 : 안동 권씨, 권겸의 딸
         *** 부인 : 안동 권씨, 권효성의 딸
  • 김양 (1953년) . . . . 5회 일치
          | 본관 = 안동(安東)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호(號)는 수문(修門)이다. 제27대 국가보훈처장을 지냈다.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에서 출생하였고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성장한 그는 [[백범 김구]]의 손자이며, [[대한민국의 공군참모총장|공군참모총장]]·[[대한민국 건설교통부|건설교통부]] 장관·[[유신정우회]] [[국회의원]]과 [[중화민국|중화민국 타이완]] 주재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대사]] 등을 지낸 [[김신 (1922년)|김신]]의 둘째 아들이고, [[김진 (1949년)|김진]]의 동생이기도 하다. 본관은 [[구 안동 김씨|안동]](安東)이다.
         [[분류:195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안동 김씨 (구)]][[분류:김구 가]][[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 육군 군인]][[분류: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분류: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분류:조지 워싱턴 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금융인]][[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분류:대한민국의 국가보훈처장]][[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김대중]][[분류:문국현]][[분류:창조한국당]][[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군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경제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역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국방대학교 교수]][[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감리교도]]
  • 영양군 . . . . 5회 일치
         [[경상북도]] 동북부에 있는 군. 면적은 815.14㎢ , 서쪽은 [[안동시]], 북쪽은 [[봉화군]], 남쪽은 [[청송군]], 동쪽은 [[영덕|영덕군]], [[울진군]]과 접하고 있으며 인구는 2018년 2월 기준 약 1만 7천 명. 영양군보다 인구가 적은 [[기초자치단체]]는 [[경상북도]] [[울릉군]]뿐이다. 그나마도 울릉군은 자그마한 섬이라는 특수성이 있으니, 이 영양군이 (섬을 빼고) [[육지#s-2|육지]] 중엔 사실상 한국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셈이며, 이는 [[팔라우]] 전체 인구와 거의 비슷하다. 아울러 인구 밀도 21명/㎢로 전국에서 [[강원도]] [[인제군]]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밀도가 낮은 시군이다. 참고로 인제군의 인구밀도는 20명/㎢. 그러나 주민등록을 옮기지 않고 인제군에서 군 복무를 하는 대다수 군인들을 감안하면, 실제 인구밀도는 오히려 영양군이 인제군보다 더 낮을 수도 있다.
         인구수에서 알 수 있듯 전국적으로 가장 낙후된 지역 가운데 하나로 이웃한 [[봉화군]], [[청송군]]과 함께 [[BYC#s-2|BYC]]로 불린다. 다른 지역에서 대중교통편을 이용하여 영양으로 가려면 대부분 이웃한 [[안동시]]를 경유해야만 한다. 고속도로, 철도편은 전혀 없으며 국도는 [[31번 국도]], [[88번 국도]]가 있다. 여기서 [[영덕군]]으로 가려면 [[918번 지방도]]를 이용하거나 청송군 진보면으로 빠져나와 [[34번 국도]]를 이용해야 한다.
         [[시외버스]]는 모두 진보와 안동을 경유하여 [[동서울종합터미널|동서울]]이나 대구 [[북부정류장]]으로 간다. 이 중 북부정류장행은 일부 수비면에서 출발한다.
          * [[장계향]] - [[음식디미방]]의 저자. [[안동시|안동]]에서 태어나 영양의 재령 이씨 집안에 시집 온 여인. [[이문열]]의 조상이다.
  • 외척 . . . . 5회 일치
         외척 세력으로 [[안동 김씨]][* 정확히는 '장동 김씨'로 재분류되는 한양 장동 일대에 거주하던 안동 김씨 일문으로, 실제 안동 등 영남에 거주하던 안동 김씨는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었으며, 당색에 있어서도 장동 김씨는 노론 계열이었던 데 비해 안동 김씨는 남인 색채가 짙었다.],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등이 유명하다.
  • 이경희 (1880년) . . . . 5회 일치
         기호중학교 졸업 후 대구 협성학교와 [[안동 협동학교]]의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09년]] [[안창호]], [[윤치호]]와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했고, [[1910년]]에는 [[신민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한 군사학교를 조직하려 했으나, [[105인 사건]]으로 [[만주]]로 망명했다.
         실력을 양성하는 길만이 조국의 독립을 앞당긴다는 신념으로 고향으로 내려와 [[대구]] [[협성학교]](協成學校)의 교사가 되었으며 [[안동 협동학교]](協同學校)의 [[교사]]를 겸임하여, [[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안동 협동학교에도 출강하며 교편을 잡고 교육구국에 힘썼다. 이 무렵 그는 [[유교]] [[성리학]]에서 [[대종교]]로 개종하였다.
         * [[1905년]] 안동 협동학교 교사(겸임)
         * [[안동 협동학교]]
  • 장가용 . . . . 5회 일치
         '''장가용'''(張家鏞, [[1935년]] [[9월 20일]] ~ [[2008년]] [[1월 19일]])은 [[대한민국]]의 [[외과]] [[의사]], [[의학자]], [[교수|대학 교수]], [[종교|종교인]], [[인도주의|인도주의자]]이자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소령]]이며 [[본관]]은 [[안동 장씨|안동]](安東)이다.
         [[분류:1935년 태어남]][[분류:2008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안동 장씨]][[분류:대한민국 육군 소령]][[분류:대한민국의 외과 의사]][[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인도주의자]][[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제주대학교 교수]][[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
  • 권영해 (1888년) . . . . 4회 일치
          | 본관 = [[안동 권씨|안동]](安東)
         '''권영해'''(權永海, [[1888년]] [[8월 12일]] ~ [[1949년]] [[6월 23일]])는 [[대한민국]]의 [[한국의 독립 운동|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분류:1888년 태어남]][[분류:1949년 죽음]][[분류:안동 권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대륜고등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반일 감정]][[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한국독립당]][[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목회자]][[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
  • 금춘수 . . . . 4회 일치
         '''금춘수'''(琴春洙, [[1953년]] [[9월 1일]] [[경상북도]] [[안동시]] ~ )는 [[한화그룹]]의 전문경영인, 기업인이다.<ref>[http://www.m-i.kr/news/articleView.html?idxno=142847 한화의 ‘금춘수’ 카드, 구관이 명관임을 입증할까]</ref>
         * [[안동대학교]] 경제학 학사
         [[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53년 태어남]][[분류:안동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안동대학교 상과대학 동문]]
  • 이영 (1492년) . . . . 4회 일치
         할아버지는 도촌 [[이수형 (1435년)|이수형]]이며 아버지는 [[홍천]][[현감]] [[이대근 (조선)|이대근]](李大根)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부호군 증 이조판서 권곤(權琨)의 딸이다. 형 이양은 [[충순위]]였으나 일찍 죽었고, 다른 형은 이당인데 정략장군 부호군을 지냈다.
         묘는 [[안동군]] [[도산면]] 감산(甘山, [[북고산]](北高山)) 후곡 대평(大坪) 유좌(酉坐)에 있다. 후일 기록이 실전되었다가 뒤늦게 찾게되어 문소 김홍락(聞韶 金鴻洛)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 어머니 : 안동권씨, 증 이조판서 권곤의 딸
         * 묘갈명, 안동시 도산면 감산 소재
  • 헌경왕후 . . . . 4회 일치
         ****** 올케 : 김제행(金悌行, 1724~?)의 딸 안동 김씨(安東 金氏)
         * 시고조모 :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 1619~1674)
         *** 서시조모 : [[희빈 장씨|옥산부대빈 희빈]] 장씨(玉山府大嬪 禧嬪 張氏, 1659~1701)
  • 흥인군 . . . . 4회 일치
         |배우자= 정경부인 안동 권씨(초취) <br/> 정경부인 연일 정씨(재취) <br/> 정경부인 안동 김씨(삼취)
         ** 부인 : 군부인 증정경부인 안동권씨(權氏, [[1813년]] [[1월 20일]] - [[1848년]] [[3월 9일]]), [[진사]] 권희인(權義仁)의 딸
         ** 부인 : 정경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 [[1834년]] [[9월 4일]] - [[1868년]] [[10월 20일]]), 김만근(金晩根)의 딸, 군부인에서 정경부인으로 개봉
  • 문무왕 . . . . 3회 일치
         9년([[669년]]) 5월 천정군(泉井郡)·비열홀군(比列忽郡)·각련군(各連郡) 세 군의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9">《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9년(669)</ref>{{refn|group=주|이 기록을 통해 이 시기에 이미 비열성(비열홀)은 다른 두 성과 함께 신라 조정의 군이 설치되어 신라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당나라는 전략요충지인 비열홀을 [[안동도호부]]에 귀속시키고자 하였다.<ref name="이상훈">이호영·이상훈,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82%98%EB%8B%B9%EC%A0%84%EC%9F%81&ridx=0&tot=614 나당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또한, 당은 [[웅진도독부]]를 설치해 백제 땅을 점거하고, 신라의 백성들을 웅진도독부 안으로 편입시키기도 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71"/> 신라 내부에선 “당은 [[왜국]]을 정벌한다는 명분으로 군함을 수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신라를 치려는 것이다.”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ref name="삼국사기-671"/>}} 같은 달, 급찬 기진산(祇珍山) 등을 당에 보내어 자석(紫石) 두 상자를 바쳤다. 또한 각간 김흠순과 파진찬 김양도(金良圖)를 당에 보내 사죄하게 하였다.{{refn|group=주|신라가 백제의 토지와 유민(遺民)을 취(取)한 것에 대해 당의 질책이 있었으므로 이를 해명하고자 하여 이들을 보낸 것이다. 흠순은 다음해 귀국하였으나 양도는 당나라에 억류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ref name="삼국사기-669"/>}} 겨울에는 당의 사신이 도착하여 신라의 쇠뇌 기술자인 사찬 구진천(仇珍川)을 당에 데려갔다.<ref name="삼국사기-669"/> 이는 당시 ‘천보노(千歩弩)’라고까지 불리며 쏘면 1천 보를 나간다는 소문이 퍼져 있던 신라의 쇠뇌 제작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15년([[675년]]) 봄 정월에 구리로 각 관청 및 주·군의 인장(印章)을 만들어 지급했다.<ref name="삼국사기-675">《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5년(675)</ref> 2월에 당의 장수 유인궤가 칠중성(七重城)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린 뒤 돌아가고, 이근행이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임명되었다. 문무왕은 다시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유감을 표명했고, 당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앞서 깎아 없앴던 문무왕의 관작을 회복시켰다.<ref name="삼국사기-675"/> 이때에는 대부분의 백제령이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고, 고구려 남쪽 경계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주와 군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에 문무왕은 당이 쳐들어올 것에 대비해 아홉 부대의 병사를 내보내 막게 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75"/> 과연 가을 9월, 당은 설인귀를 대장으로 하는 군사를 신라에 보내 천성(泉城)을 치게 했는데, 이때 당에 숙위하고 있던 풍훈(風訓)<ref group="주">앞서 문무왕에 의해 처형당한 김진주(金眞珠)의 아들이다.</ref>이 향도(鄕導)로서 당을 도왔다.<ref name="삼국사기-675"/> 그러나 신라의 장군 문훈(文訓) 등의 선전으로 당병 1,400명을 죽이고 그 병선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치면서 내버리고 간 전마 1천 필까지 신라의 손에 들어왔다.<ref name="삼국사기-675"/> [[9월 29일]]에는 이근행이 20만 군사를 이끌고 매초성(買肖城)에 진을 쳤다. 신라군이 이를 공격하자 당군은 말 30,380필과 무수한 병기를 남겨 놓고 도망갔다.<ref name="삼국사기-675"/>{{refn|group=주|다만 이러한 전쟁 와중에도 신라는 당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있었다.<ref name="삼국사기-675"/>}} 나아가 안북하(安北河)를 따라 관(關)과 성을 설치하고 또 철관성(鐵關城)을 쌓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해에 신라와 당이 벌인 크고 작은 싸움이 18번인데, 모두 신라가 이겨서 당병 6,047명을 죽이고 말 200필을 얻었다고 한다.<ref group="주">하지만 아달성(阿達城)이나 적목성(赤木城)에서는 성을 침공한 말갈병에 의해 성이 함락되고 약탈당했으며, 아달성주 소나(素那)나 적목현령 탈기(脫起)가 이때의 싸움에서 전사했다. 석현성(石峴城)이 당병에게 함락되었을 때는 현령 선백(仙伯)과 실모(悉毛) 등이 전사했고, 칠중성은 당과 거란·말갈의 군사들에게 포위당했을 때 간신히 함락은 면했지만 소수(小守) 유동(儒冬)이 전사하는 등, 신라측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이듬해에도 당은 다시 도림성(道臨城)을 함락시켰다.</ref>
         16년([[676년]]) 7월 당군이 도림성(道臨城)을 공격해 현령(縣令) 거시지(居尸知)를 죽였다.<ref name="삼국사기-676">《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6년(676)</ref> 11월에 사찬 [[시득]](施得)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 해전|기벌포]](伎伐浦)에서 싸웠다. 이 싸움에서 신라는 패했지만, 다시 나아가 22회에 걸친 크고 작은 싸움에서 모두 승리하여 당군 4천여 명을 목베었다.<ref name="삼국사기-676"/> 이후 당은 백제령 안에 있던 웅진도독부를 [[요동]]의 [[건안성]](建安城)으로 옮기고, 평양에 두었던 안동도호부도 [[요동성]](遼東城)을 거쳐 신성(新城)으로 옮기는 등 한반도에서 자국의 병사들을 철수시켰다.<ref name="자치통감-677">《자치통감》 권202 唐紀十八高宗天皇大聖大弘孝皇帝 儀鳳 2년(677)</ref>
  • 장기오 (공무원) . . . . 3회 일치
          | 본관 = [[인동 장씨|인동]](仁同)
         [[본관|본관(관향)]]은 [[인동 장씨|인동(仁同)]]이고 [[호 (이름)|아호(雅號)]]는 운정(雲汀)이며 [[서울특별시|서울]] 출생이다.
         [[분류:193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 육군 중장]][[분류:인동 장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하나회]][[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범죄인]][[분류:유교 이탈자]][[분류:불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분류:서울공업고등학교 동문]][[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육군기계화학교 동문]][[분류:육군공병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동국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전두환 정부의 국무위원]]
  • 장서희(1972) . . . . 3회 일치
         ||<#9966FF> '''{{{#FFFFFF 본관}}}''' ||<(> [[장(성씨)|흥덕 장씨]][* 2018년 1월, ‘[[아는 형님]]’에 출연해 “어디 서씨냐”고 [[이수근]]이 잘못 묻자, ~~“장씨냐고 물어야지!”라고 핀잔을 주면서~~ “흥덕 장씨다.”라고 밝혔다.] ||
  • 전형필 . . . . 3회 일치
         [[훈민정음 해례본]]에 관한 일화와 존 개츠비의 소장품인 [[고려청자]]의 수집에 대한 일화가 유명하다. [[1942년]] [[경상북도]] [[안동시|안동]]에서 소재되어있던 [[훈민정음 해례본]]은 원래 광산 김씨 종가의 긍구당 서고에 보관되어 오던 광산김씨 문중의 가보였다고 한다. [[세종]]이 광산김씨 문중에 여진정벌의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로 내린 서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 집안의 사위였던 이용준이 매월당집 등을 비롯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을 몰래 빼돌려 안동의 자택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김태준]]을 통해 전형필 선생에게 훈민정음 해례본만 만원에 판매하였다.
  • 한명회 . . . . 3회 일치
         ** 제수: 안동 권씨. 문경공 권제(文景公 權踶)의 딸. 길창부원군 [[권람]]의 동생. 슬하 1남 1녀.
         ** 자부: 흥덕장씨.
         ** 자부: 안동 권씨
  • 경상북도 . . . . 2회 일치
         [[안동시]]''' || 安東市 || 1,521 || 169,720 || 69,617
         안동찜닭
  • 박근혜 . . . . 2회 일치
         이날 회견에 참여한 [[안동선]] 전 의원은 [[2002년]] [[새천년민주당]]을 탈당,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옮겼다가 [[2004년]] 1월 새천년민주당으로 복당했지만, [[2007년]] 제17대 대선을 앞두고 다시 탈당해 [[이회창]] 후보 지지 선언을 하고 [[자유선진당]]에 입당하였다. 이윤수 전 의원도 2002년 안동선과 함께 탈당했고, 2007년 제17대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후보 지지에도 동참하였다. 송천영 전 의원은 1992년 민주당을 탈당, 국민신당 창당에 참여했다가 그해 11월에는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으며, 1997년에는 이회창 후보 불가론을 주장하며 [[신한국당]]을 탈당하였다. 그 뒤 2000년에는 민주당에 공천 신청을 했고, 2002년 12월엔 이인제를 따라 민주당을 다시 탈당해 자민련에 입당하였다. 송 전 의원은 2007년 대통령 후보 경선 때는 다시 한나라당 대전시당 고문직을 맡아 이명박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다. 송 전 의원은 또한 2007년 [[강창희]]에게 불법 정치자금 3000만 원을 건넸다가 돌려받은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과 추징금 3000만 원을 선고받고 구속됐던 전력도 있다. 이 밖에 이날 회견을 한 조한천, 이희규, 반형식 전 의원 등은 지난 2004년 혹은 2008년 총선에서 이미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했던 인사들이었다.
  • 박승임 . . . . 2회 일치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 때 [[조선 태종|태종 이방원]]을 도운 공로로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된 [[박은 (1370년)|박은]]의 5대손이다. 아버지 박형은 원래 안동 출신으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으며 뒤에 안동을 떠나 처가가 있던 영천(榮川)으로 이주해서 살게 됐다. 어머니는 영천 지역의 명문가인 예안김씨 출신으로, 김만일(金萬鎰)의 딸이다. 박승임은 7형제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 박제균 (1887년) . . . . 2회 일치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이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직전인 [[1909년]]에 경상북도 [[안동군]] 주사가 되어 [[대한제국]] 말기에 관계에 들어섰다.
         이듬해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총독부]] 체제가 들어서면서 총독부 군서기에 임명되었다. 안동군에서 근무를 시작하여 [[예안군]], [[비안군]], [[의성군]], [[경주군]] 등 경상북도 지역에서 군서기로 일했다. 경상북도 재무부 세무과를 거쳐 [[1924년]]에는 총독부 군수로 승진하였다.
  • 배대윤 . . . . 2회 일치
         * [[안동고등학교]] 졸업
         [[분류:194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충청북도 출신 인물]][[분류:진보중학교 동문]][[분류:안동고등학교 동문]][[분류:건국대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분류:김대중]][[분류:노무현]][[분류:한나라당의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장]]
  • 손치은 . . . . 2회 일치
         [[1932년]]에 [[경상북도]] 안동경찰서에서 순사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일본인 경찰관이 살해되고 조선인 청년 5명이 용의자로 체포된 일이 발생했다. 이때 손치은이 무료로 변호를 맡아 이들이 무죄임을 밝혀냈다.<ref>{{저널 인용
         |제목=[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⑫] 안동 가와카미(川上) 순사 살해사건
  • 영덕군 . . . . 2회 일치
         [[고속버스]]편을 이용할 때에는 인근의 [[안동시]]나 [[포항시]]를 찾는 것이 편리하다. [[시외버스]]는 [[대구광역시]]나 [[포항시]], 울진 같은 근거리는 많이 다니는 편이고, [[동서울터미널|서울]]을 오가는 [[시외버스]]도 거의 1시간 간격으로 있다. 시외버스를 이용하고 싶으면 관내의 [[영덕터미널]]이나 [[강구시외버스터미널]], 그리고 [[영해버스터미널]]을 이용하면 좋다.
         [[국도]]는 포항과 울진을 연결하며 남북으로 관통하는 [[7번 국도]]와 서쪽으로 진보, 안동 방면으로 갈 수 있는 횡단도로인 [[34번 국도]]가 있다.
  • 울진군 . . . . 2회 일치
         울진의 경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원자력발전소이다. 울진군 북면 부구리에 [[한울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데, 워낙에 교통이 불편한데다 그나마 근처에 대도시(울산,부산,광주)가 있는 다른 원자력발전소와 달리 근처에 도시다운 도시도 없다. 인구 15만 이상 도시를 기준으로 삼으면 강릉이 북쪽으로 110km, 안동이 남서쪽으로 117km, 포항이 남쪽으로 120km 떨어져 있다. 대신 근처에 큰 도시가 없다는 건 만약 방사능이 유출될 시에 위험지역 안에 들어있는 사람이 그만큼 적다는 뜻이니 국가적 차원에서는 오히려 좋은 거라고 봐야 한다. 때문에 근무 지원자가 적어서 한국수력원자력에서는 10년 이상 한울원전에서 계속 근무할 것을 전제로 하는 특별채용도 실시하고 있다.
         경북 북부 지역에도 영동 방언 스런 "~아이래요.", "~아니드래요." 라는 표현이 존재하는데, 재미있게도, 억양은 전형적인 [[동남 방언]] or 동남 + 영동 ([[동남 방언]] 억양이 좀 더 주된 양상) 이다. 이렇게, 경북 북부 지역 (예천, 영주, 안동북부, 봉화)에서도 [[동남 방언]]과 영동/강원 방언의 점이적 특징이 일부 보인다.
  • 이준승 . . . . 2회 일치
         1934년에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1956년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여 이듬해 졸업한 이후 육군 법무관을 마치고 1961년 [[대구지방검찰청]]에서 처음으로 검사를 시작하였다. 이후 1963년 [[청주지방검찰청]]과 1966년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검사를 하였으며 1969년 [[국회사무처]] 법제사법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파견되었다가 1971년 [[인천지방검찰청]] 부장검사로 검찰에 복귀하였다. 이후 1973년 [[서울지방검찰청]] 남부지청 1977년 [[서울지방검찰청]] 1978년 [[청주지방검찰청]]에서 부장검사로 재직하였으며 1978년에 차장검사로 승진하여 [[청주지방검찰청]] 차장검사에 임명되어 1979년에 [[대구지방검찰청]]으로 전보되어 차장검사로 재직하였다.
         [[분류:1934년 태어남]][[분류:2012년 죽음]][[분류:안동시 출신]][[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지방검찰청 검사장]][[분류:대한민국의 변호사]][[분류:대한민국의 대법관]]
  • 장대환 . . . . 2회 일치
         '''장대환'''(張大煥, [[1952년]] [[3월 21일]] ~ )은 [[매일경제]]와 [[매경미디어그룹]]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있는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다. 본관은 [[흥덕 장씨|흥덕]].
         [[분류:195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흥덕 장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매경 미디어 그룹]][[분류:경기고등학교 동문]][[분류:로체스터 대학교 동문]][[분류:조지 워싱턴 대학교 동문]][[분류:뉴욕 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김대중 정부]][[분류:대한민국 공군 대위]][[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
  • 장도 (1876년) . . . . 2회 일치
         '''장도'''(張燾, 음력 [[1876년]] [[음력 5월 7일|윤 5월 7일]]/양력 1876년 [[6월 28일]] ~ ?)는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법조인으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본관은 [[덕수 장씨|덕수]]이다.
         [[분류:한국의 법학자]] <!-- 1906년 《형법론총칙》 -->[[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법조인]][[분류:일제 강점기의 법학자]][[분류:형법학자]][[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주오 대학 동문]][[분류:덕수 장씨]][[분류:실종자]]
  • 장발 (화가) . . . . 2회 일치
         '''장발'''(張勃, Thomas Chang, [[1901년]] [[4월 3일]] ~ [[2001년]] [[4월 8일]])은 [[대한민국]]의 [[미술가]]이며 [[서양화|서양화가]] 겸 [[외교관]]이다. 본관은 [[인동 장씨|인동]]이며, 초명(初名)은 '''장지완'''(張志完), [[호 (이름)|호]](號)는 우석(雨石), 우당(宇堂), 누수(樓樹)이다. 정치가 [[장면]]의 친동생이며, 대학 교수 [[장진 (1927년)|장진]], 가톨릭 주교 [[장익 (1933년)|장익]]의 숙부이다. [[한성부]] 출생이며 [[인천광역시|경기도 인천]]에서 성장하였다.
         [[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작가]][[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예술원 회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장면]][[분류:윤보선]][[분류:대한민국 제2공화국]][[분류:인동 장씨]][[분류:병사한 사람]][[분류:보스턴 대학교 교수]][[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일제 강점기의 미술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미술 평론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63년) 당원]][[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인천박문초등학교 동문]][[분류:보성고등학교 (서울) 동문]][[분류:컬럼비아 대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평화민주당 (1987년)]][[분류:대한민국의 백세인]][[분류:유교 이탈자]][[분류:이탈리아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미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장익 (1933년) . . . . 2회 일치
         '''장익'''(張益, [[1933년]] [[11월 20일]] ~ )은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이자 시민사회단체인이다. [[로마 가톨릭교회]] [[주교]]이며, 세례명은 십자가의 요한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비서신부 등을 거쳐 [[천주교 춘천교구]]장과 [[천주교 함흥교구]]장 [[서리]] 그리고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제4대 [[부통령]]을 지낸 운석 [[장면]](張勉)의 넷째 아들이다. 본관은 [[인동 장씨|인동]]이다.
         [[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33년 태어남]][[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 신학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 주교]][[분류:평화민주당 (1987년)]][[분류:새정치국민회의]][[분류:서울가톨릭대학교 교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장면]][[분류:함세웅]][[분류:천주교 춘천교구장]][[분류:인동 장씨]]
  • 장평도정 . . . . 2회 일치
         우성령 이석은 [[안동 권씨]] 종손(從孫)의 딸과 혼인하여 덕창부령(德昌副令) 이자인(李自仁) · 시천부령(矢川副令) 이자의(李自義) · 해평부령(海平副令) 이자례(李自禮) · 화성부령(化城副令) 이자지(李自智) · 가조부령(加祚副令) 이자신(李自信)의 5남을 두었다.<ref name=autogenerated1 />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장평도정의 손자 수주정 이윤인의 13대손이다.
         **서자부 : 안동권씨, 권종손(權從孫)의 딸
  • 장헌식 . . . . 2회 일치
         }}</ref> 본관은 [[인동 장씨|인동]](仁同), 호는 취운(翠雲)이다. 일본식 창씨명은 기타 하리마(張間憲植)이다.
         [[분류:1869년 태어남]][[분류:1950년 죽음]][[분류:조선 사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군정기]][[분류:대한민국 사람]][[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인동 장씨]]
  • 정성왕후 . . . . 2회 일치
         ** 조모 : 증 정경부인 [[안동 김씨]](贈 貞敬夫人 安東 金氏, 1630~1709) - 참봉 김정지(參奉 金鼎之)의 딸
         * 시조모 :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 1619~1674)
  • 폐비 윤씨 . . . . 2회 일치
         * 조모 : 정부인 [[안동 권씨]] (貞夫人 安東 權氏, 생몰년 미상)
         *** 올케 : 정부인 [[안동 권씨]](貞夫人 安東 權氏, 생몰년 미상)
  • 한지호 . . . . 2회 일치
         |청소년 클럽=[[안동고등학교]]<br />[[홍익대학교]]
         [[분류:198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분류:부산 아이파크의 축구 선수]][[분류:안산 무궁화 축구단의 축구 선수]][[분류:아산 무궁화 축구단의 축구 선수]][[분류:K리그1의 축구 선수]][[분류:K리그2의 축구 선수]][[분류:안동고등학교 동문]][[분류:홍익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함중아 . . . . 2회 일치
         경상북도 대구(지금의 대구광역시) 출생이며 한때 [[경상북도]] [[포항시|포항]]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이후 [[경상북도]] [[안동시|안동]]에서 성장한 그는 1971년 언더그라운드 라이브 클럽에서 록 음악 가수 첫 데뷔하였으며 이후 1977년 [[함정필]], [[정동권|최동권]] 등과 함께 제1회 [[MBC 대학가요제]]에서도 입상을 한 바 있고 이후 1978년 1집 발표하는 등 록 음악 밴드 활동도 병행을 하였는데 그 후로도 1988년 시절까지 [[윤수일]], [[조경수]], [[유현상]], [[박일준]] 등과 함께 언더그라운드 라이브 클럽에서 [[록 음악|록]] [[가수]] 활동으로 인기를 구가한 그는 《내게도 사랑이》, 《풍문으로 들었소》 등의 작품이 공전 히트를 기록하였다.
  • 흥친왕 . . . . 2회 일치
         이는 [[조선 철종|철종]] 사망 당시 12세의 미성년자였던 [[대한제국 고종|이명복]]([[흥선대원군]]의 차남)이 성인인 흥친왕보다 조종하기 쉬울 것이라는 [[흥선대원군]]의 계략과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의 묵인이 작용한 결과였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일부를 포섭할 때, [[김병학]](金炳鶴)의 딸, 혹은 [[김병문 (조선후기)|김병문]]의 딸 중에서 둘째 아들인 [[대한제국 고종|명복]]의 배필로 맞이하기로 약속한 바 있다. 이것 역시 재면 보다는 명복을 선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한때 그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에 의해 큰아버지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로 보내지는 것이 고려되기도 했다. 그의 흥완군 양자 지정 논란은 [[1864년]] 고종에 의해 취소되어 최종 종결되었다.
         * [[귀인 장씨]]
  • 권영진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분류:198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SK 와이번스 선수]][[분류:대구옥산초등학교 동문]][[분류:대구중학교 동문]][[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교육과학대학 동문]][[분류:안동 권씨]][[분류:경찰 야구단 선수]]
  • 권오현(배우) . . . . 1회 일치
         [[분류:196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어린이 배우]][[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분류:창극 배우]][[분류:1976년 데뷔]][[분류:안동 권씨]][[분류:평창군 출신 인물]]
  • 권은희 (1959년) . . . . 1회 일치
         [[분류:195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원화여자고등학교 동문]][[분류:대구남도초등학교 동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구남중학교 (대구) 동문]][[분류:경북대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옛 새누리당의 정치인]][[분류:바른정당의 정치인]][[분류:바른미래당의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국회의원]][[분류:안동 권씨]]
  • 권재진 . . . . 1회 일치
         [[분류:195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 공군 대위]][[분류:대한민국의 지방검찰청 검사장]][[분류:대한민국의 고등검찰청 검사장]][[분류: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실 수석비서관]][[분류:이명박 정부의 국무위원]][[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안동 권씨]][[분류:대한민국의 사외이사]][[분류:LS그룹]]
  • 김동석 . . . . 1회 일치
         1903년 [[경상북도]] [[선산]][[군(행정구역)|군]] 선산면 동부리(현 [[구미시]] 선산읍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안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협성학교에 재학하다 중퇴하였다. 이후 [[일본]] [[도쿄]] 외국어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 김숙자 (1389년) . . . . 1회 일치
         [[1414년]](태종 14) 봄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417년]](태종 17) 봄 중성균시(中成均試)에 일등으로 합격하였으나, 그 해의 회시(會試)에는 낙방하였다.<ref>佔畢齋集彝尊錄 佔畢齋集彝尊錄 (上) 子通訓大夫前善山都護府使宗直撰, 先公紀年第二</ref> [[1419년]](세종 1) [[안동]][[향시]](安東鄕試)에 제2등으로 합격하여 [[한양]]으로 상경, [[1419년]](세종 1) [[과거 제도|식년 문과]]에 병과 1등으로 급제하였다. [[장사랑]] 권지[[성균관]]학유에 임명되거 고향으로 돌아왔다. [[1421년]] 봄 학유에 다시 임명되고 이듬해 [[1월]] [[한양]]으로 올라가 관직을 시작하였고, 사관(史官)에 임명되었다. 이때 전처인 한씨와 이혼하였다.<ref name="ginyon"/> 전처 한씨의 자매의 남편 김주(金宙)는 의술 재주가 있었는데, 김주는 성주목사 이상선(李相善)에게 그가 [[과거 제도|과거]]에 합격한 후 아내를 출처했다고 고하였고, 이는 그대로 [[예문관]]에 보고되었다.<ref name="ginyon"/>
  • 김영한 (1900년) . . . . 1회 일치
         [[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1900년 태어남]][[분류:1980년 죽음]][[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안동 김씨 (신)]][[분류:노태우 가]]
  • 김윤동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분류:199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KIA 타이거즈 선수]][[분류:대구남도초등학교 동문]][[분류:경상중학교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안동 김씨 (신)]][[분류:상무 야구단 선수]]
  • 김태한 . . . . 1회 일치
         [[분류:대구중학교 동문]][[분류:대구초등학교 (대구)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안동 김씨 (신)]]
  • 남보라(배우) . . . . 1회 일치
         완도사랑채마지막칼국수였던 [[2005년]]에 11남매[* 2005년 당시에는 11남매였다. 방송 당시 셋째와 아홉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방송에 거의 비치지 않았다.]의 일상 생활을 담은 MBC 예능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코너 "천사들의 합창"에 맏딸로 출연하며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출연 직후에는 [[연예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관계자들의 제의도 거절했으나 부모님의 설득과 계속된 소속사의 러브콜 끝에 연예인이 되기로 [[http://v.entertain.media.daum.net/v/20060812000512864?f=m|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렇게 남보라는 [[신동엽(코미디언)|신동엽]]이 진행하는 "천사들의 합창"을 계기로 얼굴을 알려 연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0곳 이상의 기획사가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308191711172510|연예인 제의를 했다고 한다.]]][* 당시 미니홈피 게시글을 토대로 보면 학교(혹은 교회)에서 성극반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천사들의 합창 당시, 웬만한 눈썰미를 가진 시청자는 남보라의 집안이 [[개신교]] 집안임을 알 수 있었을 듯. 원래 초등학교를 장안동에 위치한 불교계 학교를 다니다가 저학년 무렵 전학을 갔었다.]
  • 박상면(배우) . . . . 1회 일치
         ||<|2> 2004년 || SBS || 폭풍 속으로 || 안동수 || ||
  • 백일섭 . . . . 1회 일치
         * [[2014년]] 《[[두근두근 내 인생 (영화)|두근두근 내 인생]]》 ... 장씨
  • 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 . . . . 1회 일치
         [[분류:안동시 출신 인물]]
  • 성세현 . . . . 1회 일치
         ||<:><#87CEEB>'''{{{#white 학력}}}'''||<:><#ffffff> 의성공업고등학교[br]경북과학대학교 사회체육과[br]안동대학교 체육학과 ||
  • 영천시 . . . . 1회 일치
         •서문통 : 서문오거리[* 총 육거리인데 동네로 들어가는길을 취급하지 않은탓인지 정식명칭은 '''서문오거리'''이다.] 가 있는 일대를 말한다[* 서문육거리쪽이 옛 영천성의 서쪽문이 있던곳이라서 그렇게 불리는것 같다 이외에 남문통과 북문통도 있다.] 영천에서 서문오거리는 가장 큰 교차로이며 과거에는 로타리방식으로 영천에 맞닿아 있는 다른지역이나 그지역 주변의 큰도시로 가는길이 거의 한방에 갈라지는 교차로 역할[* ([[대구광역시|대구]],[[경산]]) 금호, ([[울산]],[[경주]]) 북안 및 [[영천IC]], ([[안동]],[[의성]],[[군위]]) 화산•신녕•청통, ([[포항]],[[청송]])오미동•화남 및 [[북영천IC]], 영천시내, 영천실내체육관, 주거지역 등.][* 이 때문인지 서문육거리에서 시내쪽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영천시외버스터미널]]이 있다.]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서문통이라 불리오고 있다. 그래서 주로 서문오거리에 있는 아파트(스카이아파트, 녹원맨션등)에 사는 사람들도 주로 서문통에 산다고 한다. 이렇게 교통의 요지이나 발전이 수십년간 되지않고 원래있던 조그마한 상권마저 죽어버리는 등 영좋지 않아 주민들의 불만은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 이경영(1960) . . . . 1회 일치
         ||2015||[[조선마술사]]||안동휘|| 628,576 ||
  • 이금서 . . . . 1회 일치
         일설에는 아버지로 알려진 이금현과 형제 관계라고 전한다. 이금현(李金現), 이금서(李金書) 부자의 이름상의 '금(金)'자가 같이 쓰인 점에서 비롯된 오해인 것 같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의 옛 풍습에 아들의 이름에 아버지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사용하기도 하였으니, 권행(權幸, 안동권씨 시조)의 아들 인행(仁幸), 공직(龔直, ?~939, 연산공씨 시조)의 아들 직달(直達)이 그 예이다.
  • 이수민(야구선수) . . . . 1회 일치
         2014년 퓨처스 올스타전 때 모습. 보다시피 상당한 [[노안]]이다. 이수민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은 같은 노안동지(...)인 동갑 [[조영우(야구선수)|조영우]]. ~~정우람????~~
  • 이철우(1955) . . . . 1회 일치
         2018년 7월 1일 영천호국원을 찾아 충혼탑을 참배하는 것으로 첫 임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동남권에 약속했던 제2청사 건립을 위해 포항 환동해안본부를 제2청사로 승격시키는 것을 시사했다. 하지만 공약 이행을 하려고하자 안동을 비롯한 북부권의 반대가 심해 난항을 겪고 있다.
  • 장민호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분류:대치중학교 동문]][[분류:199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NC 다이노스 선수]][[분류:경기고등학교 동문]][[분류:장씨]]
  • 장범준 . . . . 1회 일치
         [[분류:버스커 버스커]][[분류:1989년 태어남]][[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상명대학교 동문]][[분류:슈퍼스타K 참가자]][[분류:장씨]]
  • 장순왕후 . . . . 1회 일치
         * 고조모 : 시중 길창부원군 권적(侍中 吉昌府院君 權適)의 딸 정녕택주 안동 권씨(安東 權氏)
  • 장원준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분류:장씨]][[분류:2015년 WBSC 프리미어 12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 선수]][[분류:2017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 선수]][[분류:경찰 야구단 선수]]
  • 장유환 . . . . 1회 일치
         [[분류:198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2007년 데뷔]][[분류:2013년 데뷔]][[분류:장씨]][[분류:개그투나잇]][[분류:개그콘서트]]
  • 장지영 . . . . 1회 일치
         [[분류:1889년 태어남]][[분류:1976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언어학자]][[분류:한글학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언어학자]][[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인동 장씨]][[분류:조선어학회 사건]]
  • 정인숙 (1945년) . . . . 1회 일치
         대학을 중퇴한 후 일정한 직업이 없던 그는 '나 정도의 얼굴이면 영화배우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을 했고, [[서울]] [[충무로]] 영화가를 전전하였다. 또한 문학공부를 하고자 했던 정인숙은 자신에게 문학을 가르쳐줄 마땅한 사람을 찾아다녔다. [[1963년]] 정인숙은 시나리오 작가인 장사공을 만나 1년 정도 교제를 했다.<ref name="hp103"/> 이 때 정인숙과 장사공은 동거를 했다는 의혹<ref>여영무, '추적 정인숙 미스터리', 《신동아 1983년 9월호》 (동아일보사, 1983) 168쪽</ref> 이 제기되기도 했다. 당시 장사공은 [[KBS]] 방송국에 《태양은 늙지 않는다》란 연속극을 집필하고 있었고, 정인숙은 곧잘 친구들에게“우리 애인은 유명한 작가”라며 자랑했다. 또한 “장씨와 약혼한 사이며 곧 영화에도 출연하게 될 것”이라고 비치기도 했다. 실제로 정인숙은 장사공의 소개로 S영화사와 접촉이 되어 2,3편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다.<ref name="ilsa01">[http://www.ilyosisa.co.kr/bbs/zboard.php?id=society&page=3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238 <nowiki>[</nowiki>제584호<nowiki>]</nowiki> 다시 떠오른 ‘정인숙의 추억’의문의 피살 미스터리 전모] 일요시사 2007년 03월 20일자</ref> 그러나 신촌과 수유리 등을 전전하며 하숙생활을 하던 정인숙과 장사공의 동거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그녀의 타고난 기질과 장사공의 사업실패가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장사공은 정인숙을 구타했고, 정인숙은 [[대구]]의 집으로 도망오기도 했다. 장사공을 사위로 여기던 정도환 내외와 두 오빠는 그때마다 아이가 철이 없으니 인내하고 데리고 살라고 거듭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도 무능력했던 장사공은 바람을 피우고 있었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두 사람의 사이는 1년 만에 파탄으로 끝났다.
  • 청도군 . . . . 1회 일치
         --[[경상도]]답게-- [[경상도 사투리]]. 단, 지리상으로는 [[경상북도]]에 속해 있으나 경북의 최남단에 위치한데다 [[경상남도]]와 접한 고장이라서 그런지, 경북 방언에 비교해 볼 때 억양과 강세가 그것보다 좀 더 뒤에 있는 편이다. 경남 방언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경북 방언을 구사한다. 쉽게 비유해서 [[안동시]]에 사는 사람이 이 곳 청도군에 놀러왔을 때 꼭 [[부울경|부산/울산/경남]] 지역에 온 거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카더라]] 식. 그렇다고 해서 부산/울산/경남 지역 사람들이 듣고 경남권 억양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억양만 들어도 경상도 사람들은 경북/경남권인 거 [[악센트]]를 들어보면 딱 알 수가 있다. 2의 E승, 2의 2승, E의 E승, E의 2승의 위엄.(...) 엄밀히는 [[대구광역시]]와 더 가까운 형태의 방언이지만, 저런 [[이유]]로 딱히 다른 경북 지역만큼 경남 방언과의 차이를 느껴 어색해하지는 않는 면이 있다. 물론 방언 특징상 사람마다 편차는 큰 편.
  • 하동부대부인 . . . . 1회 일치
         하동부부인이 하동부대부인으로 오인된 것은 [[조선 영조|영조]] 즉위년에 [[조선 영조|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추보를 논의할 때 예조판서 [[이진검]]이 "선조(宣祖) 때에 덕흥군(德興君)을 높여서 ‘대원군(大院君)’이라고 하였고, 군부인(群夫人)을 ‘부대부인(府大夫人)’이라고 하였다."고 잘못 진달하였기 때문인데<ref>《조선왕조실록》영조 1권, 즉위년(1724 갑진 / 청 옹정(雍正) 2년) 9월 21일(신유) 2번째기사</ref>, 사실 이는 [[이진검]]의 잘못이라기보다 [[조선 경종|경종]]2년에 부제학 이명헌이 [[조선 경종|경종]]의 사친인 [[희빈 장씨]]를 추보할 것을 상소하며 "선조조(宣祖朝)에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숭(追崇)하였을 때에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의 의논을 인용하여, 빈(嬪)자 위에 특별히 하나의 대(大)자를 더하고, 이어서 본관(本貫)을 취하여 모부대빈(某府大嬪)으로 삼을 것"을 시초로 한다.<ref>《조선왕조실록》경종 9권, 2년(1722 임인 / 청 강희(康熙) 61년) 7월 17일(경자) 1번째기사</ref> 당시 동석했던 [[이진검]]이 이명헌의 말을 잘못 기억하여 영조 즉위년에 잘못 진달하였을 가능성도 없진 않으나 예조판서인 [[이진검]]이 사실을 전혀 확인하지 않고 진달하였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만큼 [[조선 경종|경종]]의 각별한 충신이었던 [[이진검]]이 부대빈(府大嬪) 작호의 유지를 위해 고의적으로 잘못 진달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로 인해 이후 정씨의 작위는 다시 본래의 작호인 하동부부인으로 정정되어 불리기도 하다가 하동부대부인·하동부인·대원군부인으로 섞여서 일컬어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아들의 지위에 따라 어머니의 작호에 대(大)를 더할 수 있다는 세종14년 때의 법령과 이미 부대부인의 작호를 쓴 여성이 있었던 전례에 의거해 마땅히 부대부인으로 삼았어야 할 정씨를 부부인으로 삼은 것은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탓으로 짐작된다.<ref>《승정원일기》[http://sjw.history.go.kr/inspection/search_result_list.jsp?oflag=0&M=0&query=%E6%B2%B3%E6%9D%B1%E5%BA%9C%E5%A4%AB%E4%BA%BA&set_id=-1&selK=1&selT=1&query_im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B2%B3%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9D%B1%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BA%9C%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A4%AB%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4%BA%BA%3C%2Fspan%3E 하동부부인], [http://sjw.history.go.kr/inspection/search_result_list.jsp?oflag=0&M=0&query=%E6%B2%B3%E6%9D%B1%E5%BA%9C%E5%A4%A7%E5%A4%AB%E4%BA%BA&set_id=596421&selK=1&selT=1&query_im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B2%B3%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9D%B1%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BA%9C%E5%A4%A7%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A4%AB%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4%BA%BA%3C%2Fspan%3E 하동부대부인], [http://sjw.history.go.kr/inspection/insp_result_s.jsp?M=0&oflag=0&set_id=596427&selK=1&selT=1&query=%E5%A4%A7%E9%99%A2%E5%90%9B%E5%A4%AB%E4%BA%BA&query_Result=&sinfo=&list_per_page=10&chkID=0&opAll=0&opP=0&opA=0&opB=0&opR=0&opT=0&opG=0&opW=0&qAll=&qP=&qA=&qB=&qR=&qT=&qG=&qW=&idS=&idE=&tc=2&pc=2&cp=1&startpos=0&pos=0 대원군부인]</ref><ref>《조선왕조실록》영조 117권, 47년(1771 신묘 / 청 건륭(乾隆) 36년) 8월 9일(정축) 1번째기사 中 "그 사체에 있어서 창빈(昌嬪)·대원군(大院君)·하동 부인(河東夫人)을 대진한 후에 어떻게 합제(合祭)할 수 있겠는가?"</ref>
  • 하정우(영화감독) . . . . 1회 일치
         ||<|2> 2005 || SBS || [[프라하의 연인]] || 조연 || 안동남 ||
  • 한말숙 . . . . 1회 일치
         *** 어머니: 인동장씨, 장숙명
  • 현진건 . . . . 1회 일치
         숙부 '''[[현영운|영운]](映運)'''은 아내 [[배정자|분남]](粉男)이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된 것을 계기로 크게 출세하여, 장관급인 대한 제국 군령부 참장, 주일특명전권공사, 원수부 검사총장, 참모부 제1국장, 농상공부 협판 등의 고위직을 거친 구한말의 전형적인 친일관료였다. 이러한 그의 벼락출세가 영운의 형제들의 관직 진출에 음으로 양으로 크게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친 '''경운'''은 지위가 정3품 통정대부까지 올랐고 의정부 외부의 통신원 국장과 전보사장을 거쳐 [[1895년]] 대구부 전보사의 주사로 취임하기도 했다.<ref>당시 전보사는 농상공부대신의 관리를 받으며 전보에 관한 사무를 수행하였으며, 1등사와 2등사로 구분되었다. 한성(서울)과 인천, 원산, 부산, 의주, 경성, 함흥, 회령이 1등사에 속했고 대구는 2등사였다. 통신원 국장이란 직책은 수준은 미비할 망정 국가의 전신, 전화, 전기는 물론 우편과 운송 분야와 관련한 시설과 제도를 관리하는 자리였기에 아무나 역임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33~34,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숙부 '''철운'''은 안동관찰부 주사 겸 용궁군수를 지냈다. 숙부 '''양운'''은 관립영어학교 출신으로 궁내부 예식원주사에 태복시 기사 등을 지내고 [[원산]]과 [[동래]]에서 영어교사로 일했으며 [[대한체육회]] 창설 멤버로 알려져 있다. 숙부 '''붕운'''은 태복시 주사를 지냈다.
  • 홍순언 (1530년) . . . . 1회 일치
         그의 가계는 남양 홍씨 첨사(詹事) 홍호(洪灝)의 동생인 예사 홍복(洪澓, 일명 홍복(洪復))의 12대손이다. [[가선대부]]에 추증된 [[홍겸]](洪謙)의 서자였다. 출신지는 한성부라는 설과 [[경기도]] [[광주군]]이라는 설이 있다. 1899년에 편찬된 [[경기도]] [[광주군]]의 향토지인 광주군지 인물편에 그에 대한 소개가 간략하게 실려 있다. 할아버지 홍경창(洪慶昌)은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안동부사(安東府使)등을 역임했고, 큰아버지 홍신(洪愼)은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 양주목사(楊州牧使), 형조참의(刑曹參議), 공조참의(工曹參議) 등을 역임하고 [[1539년]](중종 34년)에는 [[명나라]]에 진하사(進賀使)로 다녀오기도 했다. 아버지 홍겸은 [[1531년]] 역과에 급제하여 [[명나라]]에 두 번 역관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 효령대군 . . . . 1회 일치
         * 장모 : 정경부인 안동권씨(? ~ 14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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